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0.26 사건 (문단 편집) === 분노에 의한 우발적 암살 === 실제로 차지철은 특전사 창설 멤버로 육군 [[중령]]으로 진급 후 바로 전역했지만 김재규는 박정희와 육사 동기였고[* 박정희는 훗날 육사가 되는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2기생이었고 김재규도 이곳 2기생이었다.] 실제 [[3군단]]장까지 역임했던 3성장군 출신이다. 워낙 권력의 중심에 있던 사람이다보니 흔히들 김재규를 4성장군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실 김재규는 예비역 [[중장]]이다. 의외로 10.26 당시 동석자 중 한 명이었던 김계원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이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육군 [[대장(계급)|대장]] 출신이다. 당시 참석했던 인물의 병역 사항을 살펴보면 박정희는 대장 예편, 김계원도 대장 예편, 김재규는 중장 예편, 차지철만 겨우 중령 예편이다. 그만큼 차지철과 계급차가 컸다. 하지만 이 역시 이미 술자리 이전부터 심복들에게 "오늘밤 거사하겠다"라고 말하고 박정희 사살 이후 "난 한다면 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단 것을 보면 단순 우발적 암살이라고 보기엔 근거가 부족하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분노]]라는 감정을 나타내는 것은 사람마다 다르고 특히 당일 삽교천과 관련하여 분노의 방아쇠를 당긴 사건이 있었기에 더 분노설이 지지받기도 한다.] 이후 행동의 어설픔들은 거사 직후의 당황, 거사 직전까지 자신의 최측근들에게조차 속내를 숨겼던 내부사정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 아니겠냔 의견도 있다. 즉, [[트리거|평소 가지던 불만에 당일의 분노가 기름을 부은 것]]이라는 의견. 당시 차지철과 김재규의 상호 견제는 절정에 달해 있었는데 이러한 암투 속에서 박정희가 차지철 손을 들어주는 경우가 많자 결국 자신이 밀렸다고 판단한 김재규가 10.26이라고 하는 극단적인 선택을 내렸다는 것이다. 게다가 차지철은 성격이 [[안하무인]]이라 박정희의 총애를 받자 대통령 신변 보호라는 본연의 임무를 넘어서서 기타 영역에까지 손을 뻗치는 월권 행위를 일삼았는데 이에 김재규를 비롯한 박정희의 측근들이 박정희에게 차지철의 월권을 경계하는 충언을 했지만 그때마다 박정희는 차지철을 오히려 두둔했고, 도리어 차지철 앞에서 김재규에게 면박을 주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로 인해 차지철의 횡포는 더 심해졌고, 때문에 거사했다는 것이다. 이는 과거 김재규의 제자였던 [[이만섭]]이 추정한 설이기도 하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8031802395|#]][[http://news.donga.com/3/all/20130813/56988552/1|#]]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이었던 김계원도 김재규가 거사 직전 " '[[대위]] 밖에 안 지낸 자식이 장군, 장관 알기를 우습게 여겨![* 차지철은 사실 [[중령]]으로 전역했다. 다만 국가재건최고회의 시절에 [[소령]]을 달고 2달만에 [[중령]] 달았으니 고까울만도 했다.] 내가 하는 일을 모조리 사사건건 방해하며 각하께 바르게 보고하지도 않고...'라 말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http://news.donga.com/List/Series_70000000000570/3/70000000000570/20130902/57370185/1|#]][* 사실 이 둘만의 문제는 아니고 [[전두환]]까지 끼어서 알고 보면 셋이 서로 속으로는 갈등이 매우 심한 상태였는데, 다만 전두환은 두 사람과는 달리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 꾹 눌러 참았다고 한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인데, 아무리 보안사령관이라지만 그때의 전두환은 소장을 경호차장에 준장을 차장보로 둘 만큼 기세등등했던 경호실장 차지철, [[부총리]]급(국정원장이 장관급이 된 건 [[국민의 정부]]부터였고 그전의 중정부장 - 안기부장은 부총리급이었다.) 중정부장 김재규에 비해 끗발이 달렸다.] 여기서 한 발짝 더 들어가면 10.26이 사전계획된 것이 아니라 순간적인 분노를 못 이겨 충동적으로 저지른 우발적 행동이라는 설도 있는데 이는 김재규가 거사 직후 자신의 본거지였던 중앙정보부가 아닌 육군본부로 가는 등 김재규의 행동이 계획적이라기엔 너무 어설펐기 때문이다. [[김종필]]도 10.26의 발단은 차지철과 김재규 간의 갈등에서 비롯된 것이고 우발적으로 김재규가 대통령을 시해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덧붙여서 박정희 집권기에 두루 요직을 거치면서 그렇게 박정희에게 충성하던 사람이 법정에서는 한국의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처음부터 계획적인 혁명을 한 것마냥 민주화 투사로 둔갑하였다고 주장했다. [[http://news.joins.com/article/18524364|#]][* 김종필은 10.26이 계획적인 거사라면 상태가 불량한 총을 사용할 리가 있겠냐며 그 사건은 우발적인 것임이 틀림없다고 단언했는데 이에 대해 [[김계원]]은 [[조갑제]]와의 인터뷰에서 김재규의 총기는 불량이 아니었으나 본인이 김재규의 총격을 방해하는 과정에서 내구성에 문제가 생겨 격발 이상이 발생한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http://m.pub.chosun.com/mobile/news/view.asp?cate=C01&mcate=M1001&nNewsNumb=20161222249&nidx=22250|#]] 하지만 이미 술자리 이전부터 심복들에게 "오늘 밤 거사하겠다"고 말하고 박정희 암살 이후에 "난 한다면 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는 것을 보면 단순 우발적 암살이라고 보기엔 근거가 부족하다는 의견도 있다. 이후 행동의 어설픔들은 거사 직후의 당황, 거사 직전까지 자신의 최측근들에게조차 속내를 숨겼던 내부사정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 아니겠냐는 의견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